<aside> <img src="/icons/hashtag_lightgray.svg" alt="/icons/hashtag_lightgray.svg" width="40px" /> 수신인 [김짓숴](https://leogi-desk.notion.site/62d2321895ad4ea4ba7353ee589a8d28) 님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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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리포트 야자나무> (시)
보내는 사람 엘린, 고, [우짬](https://leogi-desk.notion.site/80a921d6c1ad404988649ff883c9ee48), [스러기(모임장)](https://leogi-desk.notion.site/cf710743e0884563ac1257d031a44641), [귤](https://leogi-desk.notion.site/a102837b87aa43bf924270a2e05e3577)
받는 사람 [김짓숴](https://leogi-desk.notion.site/62d2321895ad4ea4ba7353ee589a8d28)
<aside> ✉️ 발신인 엘린 님이 보낸 의리입니다.
안녕하세요 김짓숴 님. 멋진 글 잘 읽었습니다. 탈리포트 야자나무를 이 글로 처음 알게 됐어요. 아주 오래 사는 나무들은 알고 있지만 꽃을 피우기까지 60년이 걸리는 나무는 전혀 몰랐네요. 인간의 입장에선 거의 평생의 기다림인데 탈리포트 야자나무는 그 긴 시간을 어떻게 느낄까요. 어쩌면 나무에겐 다른 식물들의 꽃이 너무 빨리 피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다 각자의 속도가 있는 거겠죠.
네 개의 구멍을 가진 둥그런 결론이 라는 마무리가 인상 깊어요. 글이 진행되는 동안 단추가 되고 싶다는 말이 뭘까 하고 생각했거든요. 그냥그냥 눈으로 훑으며 곱씹게 되네요. 단추, 동그란 단추에 송송 뚫린 동그란 구멍을 머릿속으로 계속 그리면서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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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ide> ✉️ 발신인 [우짬](https://leogi-desk.notion.site/80a921d6c1ad404988649ff883c9ee48) 님이 보낸 의리입니다.
시작하기에 앞서 제가 시를 읽고 쓰는 건 좋아해도 해석은 영 잼병이라는 점을 쿠션으로 깔고 가겠습니다🥹 짓숴님의 글을 대차게 곡해해도 이해해주시길...
우선 저는 이 종을 이번에 처음 알게돼서 열심히 찾아봤는데, 몇십년동안 살다가 마지막에서야 꽃과 열매를 맺고 얼마 안 가서 죽는 나무더라고요. 식물의 세계는 신비하다... 그래서 제가 읽어낸 <탈리포트 야자나무>의 중심 주제는 불멸자(에 한없이 가까운 존재)의 슬픔입니다. 화자는 우선 어린 것들의 죽음을 슬퍼합니다. 봄이 온다는 것은 그에게 더는 탄생으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저 짧은 찰나 후 예정된 죽음일뿐이죠. 그에게 타 존재(아마 다른 한해살이 식물들)는 이미 죽은 자들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래서 화자에게 봄은 죽음의 계절입니다. 그는 봄이 도래하면 비애와 탄식을 내뱉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는 배신을 슬퍼합니다. 봄은 배신의 계절입니다. 그는 번번이 죽음을 기대했다가 그에 배신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시작에 끝이 있으리라는, 그러니까 다른 존재와 '같은' 끝이 있으리라는 믿음은 해마다 내버려집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화자는 고독을 슬퍼합니다. 찰나의 필멸이 가득한 세계에서 화자는 이질적이라 고독합니다. 봄에 겉으로 보기엔 동질적인 새파람을 영영 잃을 수 없는 절망絕望이 있습니다. 어린 것들은 분홍꽃도 되고 단추도 되고 하는데, 화자는 영원히 단추를 절망切望하기만 합니다. 사실 원하지만 갖지 못한다는 것은 절망絕望과 절망切望을 한 단어로 만들죠. 그렇다면 여기서 단추는 무엇인가... 일단 탈리포트 야자나무는 생의 끝에서야 열매를 맺고, 그 열매의 씨앗은 단추로도 만들어진다고 하더라고요. 아마 다른 식물의 씨앗도 단추가 되리라고 추측해봅니다. 그리고 1연에서 화자는 구멍을 갖고 싶다고 했고, 마지막 연에서는 네 개의 구멍을 가진 둥그런 '결론'이 되고 싶다고 했습니다. 이래저래 찾아봤지만 솔직히 도저히 모르겠어서(ㅋㅋㅜ) 그냥 중심주제와 연관지어 생각해보니, 어쩌면 구멍 자체가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단추는 기본적으로 단독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에 꿰이고 엮임으로써 그 쓸모를 찾는 존재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화자는 다른 존재와 꿰이고 싶은 듯합니다. 엮이고 싶은 듯합니다. 이 영원에 한없이 가까운 고독을 끝내고 한데 엉기고 싶은 마음이 단추라는 형태로, 타인과 하나가 될 수 있는 구멍에 대한 소망으로 발한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단추로서 결론지어진다면 화자는 단추 이전의 씨앗, 씨앗이전의 열매, 열매 이전의 꽃이 (죽음이 도래했기에) 살며시 서러워하더라도 감사한 마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이겠죠.
이 고목이 부디 자유로워지길...🥹🥹 그리고 너무 많이는 슬퍼하지말고 지금의 생을 즐기길ㅋㅋㅋㅋㅜㅜ ... 행복해라행복해라 조금 저급(?)한 비유를 해보자면 마이너장르 고인물(궁극의 연성을 위해 영원히 연성을 못하는 타입)이 찍먹뉴비들(연성 하나 하고 딴거하러감)을 바라보면서 슬퍼하는 상황으로도 느껴져서 괜히 다른 방향으로도 짠해졌네요.
오랜만에 시를 씹뜯맛즐하는 게 너무 즐거웠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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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ide> ✉️ 발신인 [스러기(모임장)](https://leogi-desk.notion.site/cf710743e0884563ac1257d031a44641)님이 보낸 의리입니다.
탈리포트 야자나무라니, 생소한 이름이라 나무의 생김새가 궁금하여 시를 1차로 감상한 후에 먼저 네이버에 ‘탈리포트 야자나무’라고 검색해봤습니다. 아무래도 우리나라에서 자라지 않고 유명한 식물은 아닌지라 나무위키 외에는 정보가 없더라고요. 그나마 나무위키에 있는 정보도 다른 식물에 비해 굉장히 적은 편이라 구글에 검색해봤습니다.
탈리포트 야자의 학명은 Corypha umbraculifera, 야자수이고, 야자수는 엄밀히 말하자면 ‘나무’라고는 할 수 없는 식물이죠. 대나무처럼. 그리고 60년을 기다려야만이 꽃을 피웁니다. Corypha는 정상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Umbraculifera는 거대한 잎과 거대한 왕관을 암시하는 그림자 베어링을 뜻하는 라틴어라고 합니다.
60년만에 꽃을 피운다는 설명을 보고 바로 떠올린 건 우리나라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대나무였습니다. 대나무도 꽃을 보기가 매우 어렵고, 탈리포트 야자와 마찬가지로 최소 60년을 기다려야만 꽃을 피운다고 알려져있습니다. 그리고 꽃을 피운 후에는 죽어버립니다. 뿌리가 전부 이어져있는 대나무의 특성상 줄기 하나만 꽃을 달랑 피우는 게 아니라 일제히 꽃을 피우고 일제히 죽는다고 하더군요. 꽃을 피우려면 뿌리에 있는 영양분을 끌어다 써야하고, 이로 인해 새로운 대나무 줄기가 자라지 못해 그 대나무숲의 10퍼센트만이 살아남는다고 하더군요.(일견 대나무의 꽃을 질병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탈리포트 야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수십년의 세월을 기다려 꽃을 피워내면 기다리는 것은 죽음입니다.
그러나 대나무와 탈리포트 야자의 사진을 보았을 때 느껴지는 인상은 확연히 다릅니다. 대나무는 소박하고 정직하며 곧고 청량한 이미지인 반면, 탈리포트 야자는 제법 화려하고 웅장합니다. 대나무는 홀로 자라지 않지만 탈리포트 야자는 하나의 개체가 오롯이 하나의 존재로 자랍니다. 그래서인지 탈리포트 야자는 외려 남들과 섞이지 못하여 고독하고 외로운 존재로 느껴집니다.
짓숴님이 글 설명에 탈리포트 야자의 특징을 “글을 쓸 당시 어려움, 질투심, 우울함, 막연함 등의 감정들과 연결”시켰다고 적어주셔서, 위에 적은 내용을 참고하여 시를 감상해보자면, 탈리포트 야자의 ‘절망’은 모호함에서 기인한 듯합니다. 차라리 나무로 태어나 줄기를 넓혀가며 매해 꽃을 틔워내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완벽하지도 완전하지도 못하고 꽃을 틔우면 기다리고 있는 죽음이라는 한계를 벗어나지도 못하는 그런 모호함이요.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초월자적인 어조이지만, 사실 탈리포트 야자는 정작 본인의 끝이 무엇이 될 지에 대한 점은 알 수 없습니다. 그저 먼저 나고 죽은 어린 것들의 마지막을 오래도록 지켜봐왔기에 막연히 자신의 끝도 ‘단추’이리라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명확하게 ‘단추’라는 사물 자체가 아니라, 단추가 상징하는 ‘죽음’을 바라고 있다고 볼 수 있겠지요. 동시에 ‘단추’를 만들어내는 것이 씨앗임을 생각해본다면 이 시에서 ‘죽음’이란 그 단어가 의미하는 말 그대로 삶의 끝, 세상과의 단절처럼 부정적인 의미라기보다는 끝끝내 맺어낸 열매, 노력의 결실, 그리고 거기에서부터 다시 뻗어나가는 세계의 연장선과 새로운 가능성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같은 크기 수목들 중 세계에서 가장 큰 꽃을 피운다는 식물의 말이라고 하기에는 7연의 ‘이 작은 꽃’이라는 표현은 참 겸손하게 느껴집니다. 이는 아마 꽃의 실제적인 크기라기보다는 그 이후를 바라보는 탈리포트 야자의 염원이 담겨있는 표현인 듯합니다.
시어와 문장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자면, 저보다 훨씬 작은 꽃들과 말을 주고받는 듯이 이어지는 듯하다가도 독백으로 처리되는 부분이, 현재 눈앞에서 대화가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계절상 봄은 이미 지나고 여름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푸르기만 한 자신의 모습에, 이미 씨를 뿌리고 죽음을 맞이한 꽃들을 보며 과거의 말을 회상하는 듯한 느낌이라 탈리포트 야자의 심정이 좀더 와닿는 느낌이랄까요. 그리고 그런 점이 또 어리지 않은 성숙한 존재이면서도 이루지 못한 염원을 못내 씁쓸히 여기는 듯한 마음도 느껴지고요.
개인적으로는 “ 되고 싶습니다 // 네 개의 구멍을 가진 / 둥그런 / 결론이 “ 이 부분이 제일 마음에 듭니다.
사실 처음에 아무런 정보 없이 이 시를 읽었을 땐 웬 단추?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는데, 후에 이렇게 제목의 식물을 검색해보고 나니 그제야 단추의 의미가 이해가 가네요. 이 시를 쓸 적에 느끼셨던 막연함이 지금은 좀 나아지셨을까요? ㅎㅎ
한가지 궁금증이 있다면 오래도록 꽃이 피기를 기다렸다가 죽는 식물은 여러가지가 있을 텐데, 어쩌다 탈리포트 야자를 소재로 삼으셨는지 그 점을 알려주시면 좋겠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잘 알려진 식물이 아니니까요 ㅎㅎ 좋은 시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른 분들이 탈리포트 야자에 대해 참고하실 수 있는 링크를 달아둡니다. :https://tropical.theferns.info/viewtropical.php?id=Corypha+umbraculifera(탈리포트 야자의 식생과 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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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ide> ✉️ 발신인 [귤](https://leogi-desk.notion.site/a102837b87aa43bf924270a2e05e3577) 님이 보낸 의리입니다.
안녕하세요, 짓숴님! 우선, 너무 늦은 감상 드리게 된 점 사과드립니다. 짓숴님께서는 괜찮다고 말씀해주셨지만, 제가 어떻게든 감상을 보내드리고 싶었어요…!
시작에 앞서 덧붙이자면, 짓숴님 시를 처음 읽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먹먹하고 가슴이 아렸는데 이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어떻게 해도 제 기분을 제대로 전달할 수 없을 것 같아서, 말문을 꺼내기가 더욱 더뎠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 감상을 쓰는 건 제게 일종의 도전처럼 느껴지기도 해요. 그치만 짓숴님의 탈리포트 야자나무를 읽고 느꼈던 이 아릿한 애상을 흐지부지 흘려보내는 것만큼은 하고 싶지 않았기에…미흡하게나마 제 기분을 표현하게 해주세요…!!
짓숴님께서는 글을 쓸 때의 복잡미묘한 심경을 생각하며 이 작품을 쓰셨다고 말씀하셨는데, 이런 의도는 말씀해주시지 않으셨다면 아예 모를 뻔했어요. 실례일지도 모르지만 저는 짓숴님의 의도와 상관없이, 무척 개인적인 감상에 젖었거든요.
아무것도 모르는 채 '탈리포트 야자나무'를 처음 읽었을 때도, 짓숴님의 덧붙임을 읽고 나서 몇 번이나 다시 읽은 이후에도, 제가 일관적으로 느끼는 감정은 너무 어리고 환하고 젊은 청춘을 바라보는 안타까움과 가여움, 사랑스러움이 한데섞인 애틋함이에요. 아마 제가 마냥 젊은 나이가 아닌데다, 그 사실에 초조해할 시기도 이미 지날 만큼 나이가 들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어요.
자신에게는 영영 오지 않을 것 같은, 찬란한 프라임 오브 라이프를 줄곧 기다리고만 있는…. 다른 나무들이 봄을 수십번씩 맞이할 동안, 일생에 걸쳐 자신의 황금기를 기다리다 죽는 나무의 심정은…정말로 어떤 말에 비할 수 있을까요. 애초에 그런 개화기를 생의 황금기라고 부를 수 있기는 한 걸까요? 그런 끝은 오히려 고역스럽기만 하겠죠…그런 면에서 절망을 갖고 싶다는 첫 연의 표현이 무척 와닿았어요.
자신으로서는 영영 느낄 일 없을 천진한 죽음을… 그것도 너무 곱고 눈부셔서 안타깝기까지 한 아가들의 죽음을 그저 몇십번이고 바라보기만 해야 한다는 것도, 분명 봄을 죽음의 계절이라 비관하기에 충분한 계기가 되었겠죠. 곁에서 들리는 호탕한 웃음소리에 밴 젊은이의 (탈리포트 야자나무보다 더욱 젊기에 몰지각할 수밖에 없는) 무지한 오해도요.
하지만 이 시가 마냥 쓸쓸하거나 비관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은, '단추가 되고 싶다'는 구절 덕분이에요. 씨앗이 아니라 단추라는 표현이 아리송하게 느껴졌지만 (제가 읽으면서 뭔가를 놓쳤는지도 모르겠어요…)
그 길고 고단한 생애 끝에 희망하는 것이 다른 이들 같은 찬란한 봄날도, 좀더 안정된 명맥도 아니라 그저 그 자그맣고 단단한 단추라는 것이… 정말로 좋은 여운을 줬어요.
새로 싹이 돋아나고 자라고 만개하는 씨앗에 비해, 단추는 새로운 생명을 이어가겠다는 의지가 느껴지지 않아요. 정말로 저 혼자 동그마니 떨어져버리는 하나의 결론입니다. 하지만 그 역시 어디에 떨어지느냐에 따라, 천과 천을 잇듯이 세상을 연결하는 하나의 이음쇠가 되겠죠. 제 지리멸렬한 생애의 결론이 그 정도면 충분하다는 것이… 그 단단한 관조가, 뭐라 말할 수 없이.. 좋아요.
남들과 같은 황금기가 제 생애에는 오지 않을 것만 같은 불안, 막연함, 절망, 비관… 그 모든 애상을 품어낸 끝에 조그맣고 동그란 단추 한 알로 남고 싶다는, 그 자그만 바람이 결코 가볍게 느껴지지 않아요. 오히려 육십 일생에 느낄 수 있는 감상을 모두 응축해놓은 것마냥 단단하고 힘있게 느껴져요.
마냥 젊지 않은 사람으로서(.. ) 이런 시선을 담아낸 시를 읽을 수 있어서 무척 기쁘고 감사했습니다. 감상은 늦게 드리게 되었지만, 그간 몇번이나 읽어보며 무척 좋다고 거듭 감탄했어요. 표현이 서투른 탓에 계속 좋다는 말만 늘어놓게 될 듯해 이만 말을 줄이겠습니다. 멋진 시를 읽게 해주셔서 감사드리고, 앞으로도 건필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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