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저는 원작을 알지 못함을 밝힙니다... 그런데 글을 읽는 내내 뭔가 2차 창작을 읽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어요. 그냥 귤 님이 진작 품고 계신 캐릭터들 같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소설의 한 부분(프롤로그 속의 평화 혹은 에필로그의, 모든 게 다 끝난 이후의 평화)을 잘라 온 것 같은 느낌이랄까요. 인물과 인물을 이해하는 데에 큰 어려움도 없었고, '난 이런 캐릭터다'라고 보여주는 방식도 무척 유연했다고 생각합니다. '아, 난 파워레인저 레드 같은 소년청춘성장스포츠물의 후배 주인공이야.'라는 식으로 마구 내 캐릭터성을 뿜어내는 게 아니라, 단지 일상의 순간 하나일 뿐이고 찰나일 뿐인데 그 안에서 이 사람의 형태가 확 느껴지는 것들이 말이에요. 사와무라가 로봇 서빙의 이야기를 듣고 확 심란해졌던 거라든지, 쿠라모치는 장난으로 한 얘기였는데 그게 진짜였던 거라든지. 그런 상황을 들으면 우리의 머릿속에 딱 자리잡는 캐릭터라는 게 있으니까요. 나중 정말로 둘이 함께 도쿄의 회전초밥집에 가서 로봇을 봤다면 한 명은 당신이 한 말이 진짜더라 사실 장난인가 싶기도 했었는데 진짜였다니 놀랐다 로봇이 세상을 지배하는 날이 정말 곧...! 이라고 마구마구 말해대겠지만, 한 명은 사실 정말 장난이었음에도 머릿속으로 (진짜였네...)라고만 생각하고 넘기겠죠. 그런 이 순간 이후의 상황, '만약'의 상황도 술술 그려지게 만드시는 넌지시..한 캐릭터 빌딩이 무척 매력적이었습니다. 삶의 순간 군데군데에 캐릭터가 드러나고 숨어있는 이런 넌지시..함이 일상적인 소재와 분위기와 너무 잘 어울리기도 했고요. 그런 부분에서 초반부 사와무라의 '아니, 아니아니아니'가 무척 좋았습니다. 같은 말을 굳이 반점을 쓸 여유도 없이 꼭 붙여 세 번이나(사실 네 번) 반복하는 것이 너무나 '사와무라답다'라고 느껴졌거든요. ㅠㅠ 이런 캐릭터, 자주 봤어... 너무 좋다...,
둘 중 누군가가 특정한 서술자인 건 아니지만, 서술 시점은 뭔가 쿠라모치에게 잡혀 있어요. 하여 사와무라를 나타내는 데에 조금 거리감이 생길까 했는데 그렇지도 않았습니다. 쿠라모치라는 사람도 사와무라라는 사람도 너무 잘 드러나있었어요. 서술이 시작되는 문단마다 누가 중심되어있는지에 따라 느낌이 확 달라지는데, 그게 매우 매력적이었어요. 사와무라가 나오는 부문에선 서술이 매우 경쾌해집니다. 쿠라모치의 서술임에도 불구하고요. '양팔을 휘두르며 소란을 떨어대는 폼'이라는 말은 쿠라모치의 조금 냉소적인 한계 안에서조차 사와무라라는 쾌활하고 활기찬 사람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목청껏 말하기만 해도 될 텐데, 양팔까지 흔들어댄다는 것에서부터 그냥 밝은 청년 정도가 아니라 아직까지 제법 '어린'(어쩌면 순수하고 오버액팅적인 면이 있는) '소년'이라는 것이 잘 느껴져요. 이런 사소한 부분들이 정말 좋습니다. 쿠라모치라는 사람은 또 어떤가요. 저 모습을 귀엽게 볼 수도 있고, '역시 우렁차다'든가 '예의 그러했듯 발랄하게' 행동한다고 볼 수도 있을 텐데, 굳이굳이 '소란을 떨어대는'이란 표현을 써서 이 사람이 사와무라의 행동을 좋지 않게 본다는 - 정확히는 저런 텐션과 익숙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쿠라모치의 단어들은 다 그런 형태를 취하고 있어요. 충격먹은 사와무라의 얼굴이 맛을 돋웠다든지, '사와무라 주제에'라는 말이라든지. 한 결 필터를 씌워서 사와무라의 발랄함을 막아냅니다. 자신의 색으로 사와무라의 원색을 희석해서 받아들이고 있죠. 그럼에도 우리는 사와무라라는 사람을 곡해해서, 정말 삶에 대한 깊이가 없는 사람이라거나 이 밝음이 무례로 느껴지는 사람 정도로 받아들일 일은 없습니다. 쿠라모치의 생각 밑에서는 결국 이 사람에 대한 인정이 느껴지고 있거든요. 함께 청춘을 같이 했고 야구를 같이 했던 존재에 대한 인정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해가 안 되는 성정과 어느 정도는 일부러 놀리고 비꼬는 무의식도 덧붙어 있지요. 쿠라모치가 사와무라를 결코 '나쁘게' 보고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도 그 사람을 그 사람 그대로 받아들이며 회상 속 순간순간들을 함께할 수 있습니다.
이 글의 특징은 유연함인 것 같아요. 장면 구성, 글의 흐름에서도 유연함을 느꼈었습니다. 그러니까 회상 나온다 회상 나온다 회상 나온다! 라고 소리를 치며 장면 전환을 마구 뽐내는 것이 아니라, 그냥 무척 자연스럽게 회상 신이 삽입됐다가, 돌아왔다가, 초밥을 먹다가... 그 모든 장면이 물 흐르듯 지나갔습니다. 모나게 툭 튀어나왔다거나 걷다 휘청거릴 만큼 푹 패였다거나 한 부분이 없었어요. 그냥 정신을 차려 보니 스크롤의 맨 밑에 있었습니다. 오히려 무척이나 일상적이고 잔잔한 소재에서는 이런 흡입력과 물흐르듯 읽어나가게 만드는 힘을 내기 어렵다고 생각하는데, 이 글은 그 생각을 완전히 꽈장창, 부서 놓는 느낌이었습니다. 야구공으로 유리창을 깨듯이... 너무 물 흐르듯 읽어나간 터라, 다 읽어놓고서 혹 기억에 잘 남지 않은 부분이 있을까 싶었는데 모든 장면들이 새록새록 기억나더라고요. 그래서 혼자 감탄을 하기도 했습니다... ㅎㅎ 이 의미에서 정말 좋아하는 부분이 '이렇게 잘 모르는 생선에는 선뜻 손이 가지 않지만' 부터 유부초밥이 다시 나올까 레일을 살피는 곳까지의 내용이었습니다. 회상으로부터 회상이, 그리고 그 회상에서 다시 현재로 돌아오는데 군더더기가 느껴지질 않습니다. 검은색, 흰색, 빨간색. 이렇게 단절된 느낌이 아니라 그라데이션이 되어있어서 현실에도 과거가 물들어있고 과거에도 지금의 관점이, 지금의 그들이 꽤 물들어있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느낌이랄까요. 그 녀석이 아니었음 도전치 않았을 새로운 맛으로부터 그 녀석의 새로운(본 적 없는, 함께한 적 없는) 어린 시절을 떠올리고, 그의 어린 시절로부터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고, 어린 시절 속의 유부초밥으로부터 '그럼 유부초밥이 또 어디 있으려나'하고 찾는 지금으로 이어지기까지. 이 하나도 거슬리는 바 없는 연쇄는 진짜 쿠라모치가 먹은 학꽁치 초밥의 맛처럼 날렵하게 빠져있고 고소하게 부스러지는 것만 같습니다. 정말... 정말 좋아요. 🥹
처음부터 눈에 들어왔던 건 회전 초밥이라는 요소였습니다. 왜 하필 회전 초밥이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물론 회전 초밥은 일본에서는 흔한 식사이긴 하지만, 뭔가 '회전', '순환'이라는 이미지가 자꾸 머리에 꽂히더라고요. 초반부를 보면 이들이 회전초밥을 먹으러 함께 온 것은 하루 이틀 있던 일이 아닙니다. 처음은 쿠라모치가 고교 은퇴를 했을 때, 또 그 이후는 사와무라가 고교 은퇴를 했을 때고, 이 글 속의 '오늘'이 오기까지도 '사흘에 한두 번은 꼭' 쿠라모치에게 초밥을 얻어먹고 있는 것 같죠. 이 회전초밥이라는 연례행사와 같은 식사가 그들 각자의 '은퇴'로부터 시작되었단 점이 인상 깊었습니다. 끝이란 말은 모순적이게도 시작이란 말을 연상시키고, 사실 그 둘은 완전히 맞닿아있죠. 내 손에서 놓치고 떠나간 초밥이 다시 돌아오는 것처럼, 고교에서 은퇴를 한다는 것은 사회생활의 시작 혹은 프로의 시작을 의미하니까요. 결국 삶이란 모든 것이 그런 순환과 연쇄의 안에 있고요. 회전 초밥을 함께 먹는 사이라. 이들은 삶의 모든 순환을 꼬박꼬박 함께하는 동료인가 보구나. 그런 생각과 함께 이 글을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별것 아닌 요소에서도 이들의 관계성을 깊이 있게 느낄 수 있어서 너무 좋았어요.
결국 결말도 함께의 나중을 기약하는 결말이잖아요. 이 글의 끝이지만 이들의 또 다른 시작이죠. 쿠라모치가 사와무라의 또 다른 새로움을 보고 싶다고 생각하는, 혹은 '그렇게 되지 않을까'라고 생각하게 되는 시작. 또 이 글 자체가 둘 다 로봇이 서빙하는 가게에 대한 진실을 몰랐던 상태에서 이젠 함께 로봇이 서빙하는 가게에 왔다는 순환의 경험 그 자체니까요. ㅠㅠ '제가 모르는 사와무라의 새로운 모습을 또 발견하게 될까.' 이 문장이 참 좋았습니다. 앞서 말씀드렸었던 쿠라모치의 기조에 있는 일말의 인정, 우리가 사와무라를 '오버액션 토끼' 정도로 느끼는 게 아니라 단지 사와무라로 느끼게 만들어주는 그 인정이 여기서 딱 드러난 것 같았어요. 새로운 생선엔 굳이 도전하지 않는 사람이 지금은 새로운 사와무라의 모습을 '기대'하고 있지요. 먹을 예정도 없었던 새로운 생선들로 배를 채웠고요. 어쩌면 이것도 '쿠라모치의 새로운 모습'에 대한 발견이 아닐까 싶었어요. 당신의 새로움을 발견하는 나조차도 새로운 나. 결국 이것도 어느 정도의 연쇄인 것 같다고 느꼈습니다. 사와무라의 시선에서의 이 식사도 무척 궁금해졌어요. ㅠㅠ
정말... 너무 좋은 글이었습니다. ㅠㅠ 서로에 대한 기대와 믿음으로 이루어진 이 관계가 도대체 어떤 관계인지 알고 싶어서 원작이 궁금해질 만큼요. 이들이 서로 함께한 청춘은 어떤 것이었을지 한 번 찾아봐야겠습니다. 🥹...
제가 무척 좋아하는 만화와 애니메이션 중에 <3월의 라이온>이라는 작품이 있는데, 그 작품의 애니메이션 op/ed 중에 범프오브치킨이 부른 'Fighter'라는 노래가 있거든요. 잘 어울릴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그 노래가 생각났어요. 이 글이 한 에피소드고, 그 에피소의 끝에 은은하게 Fighter가 페이드인 되면서 틀어지는 것 같은... 애니메이션 한 회를 본 것 같은 느낌. 같은 앨범에 있는 'Hello, World!'라는 노래도 떠올랐어요. 함께 들으면서 다시 읽어봐야겠습니다. ㅎㅎ...
야구의 야 자도 모르는데도 너무 재밌는 글이었어요. ㅠㅠ 좋은 글 너무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