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이름들에 대한 공지와 첫 문장부터 조금 새로웠습니다. 책 하나를 뽑아들고 펼쳤는데, 펼쳐진 책이 자연스레 두 사람의 공간으로 디졸브 되는 화면이 연상됐거든요. '책을 다루는 책이 시작되는구나'라는 감상에 꽤 두근거리는 첫 시작이었던 것 같습니다. 책을 주제로 삼은 이야기여서 그런지, 계속해서 책과 관련한 표현들이 등장하는 것도 좋았습니다. 초반부 '표지만 맞닿은 책처럼 멀었다'라는 표현처럼요. 그럼요. 표지만 맞닿아있지, 사실상 주제를 나타내는 맨 앞자리의 번호가 1과 7로 갈리는 두 책일 수도 있죠. 서점 속 책도, 세상 속 사람들도. 아주 가까이에 있고 제법 오래 삶이 겹쳤었다고 해서 닮았다거나, 그래서 예측할 수 있다거나, 그런 가능성이 무조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맨 첫 부분의 두 사람과 제목이 아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습니다. 삶 속의 어떤 찰나는 내 모든 삶 전체보다 더 영원하고 깊이 있고 선명한 것이 있으니까요. 두 사람 서로가 서로에게 그런 찰나겠구나, 하는 예측을 부드러운 방법으로 확신시켜준 도입부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맨 첫 시작에서의 뉴스와 같은 문단, 그리고 승관이 맡긴 책을 찾으러 오기 전 등장한 '침입'이라는 단어. 과연 이것이 무엇일까, 계속 궁금해하면서 글의 끝으로 걸어갔던 것 같습니다. 글을 읽게 하는 한 각의 힘이 되어주지 않았나 싶어요. 사실 서점이라는 요소가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와 같이 평화롭고 일상적인 글의 소재나 무대로 많이 쓰인다고 생각했었는데... 그와 같은 시선에서 읽어 내리던 글에 이런 판타지가 녹아있었다니. 새롭기도 하고 즐겁기도 했습니다. 또 '도대체 이 사람은 왜 계속 안 나타나는 거야? 일종의 밀당인가? 복선인가?'라고 생각했었는데... 이 불쾌함(?)이 차후 판타지 속성의 큰 예시로써 작용되는 것도 신기했습니다. 어쩌면 반갑다는 표현이 더 잘 맞을지도 모르겠어요. 아 그게 그래서였어?! 승관 씨 그래서 그랬던 거였어? 하며... 글을 다 읽은 뒤, 스크롤의 꽤 아랫부분에서 스크롤의 가장 윗부분의 승관과 찬이를 다시 떠올려 만나게 되더라고요. 그 만남이 제법 반갑고 통쾌했습니다. 승관의 장기연체라는 사실이 나!!! 복선!!! 수상해해라!!!라고 등장하는 게 아니었던 것도 좋았습니다. 사실상 찬이는 승관이 '예약을 걸어놓고서도 이렇게나 오래 또 자주 나타나질 않는다'라는 부분보단 단지 나타나질 않는다는 부분 때문에 마음을 앓으니까요... 저는 서술자의 관점에 무척 이입해서 글을 읽다가 빠져나온 뒤 또 읽어보는 스타일인데, 때문에 처음 글을 읽을 때엔 찬의 억울함에만 집중하느라(함께 끌려가느라) '왜 안 나타나는 거지?'라는 근본적인 물음을 던질 여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차후 복선이 회수될 때 더 느낌표가 마구 튀어나갔던 것도 있는 것 같아요. 승관도 찬도 이 판타지를 너무나 당연한 것처럼 - 적어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인 것처럼 다루니까요. 그들에겐 일상이고 충분히 벌어질 법한 비극이지만, 저희에겐 너무 크나큰 판타지이지 않습니까. 판타지가 지극히 당연한 모습으로 삶에 존재해온 사람들의 이야기는, 이렇게 제법 뻔뻔할 줄 알아야겠다고 느꼈습니다.
본체를 아예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의 감상이라는 시점에 집중해서 글을 읽었습니다. 본체 분들을 전혀 모르는 건 아니지만, 얼굴도 조금 헷갈릴 만큼 잘 아는 편은 결코 못 되거든요... 그저 창작 속의 한 사람, 하나의 인물이라는 생각으로 글을 읽었습니다. 그런 시점에서 글을 읽어도 주인공들의 성격과 그에 따른 행동 반경이 제법 잘 이해됐습니다. 특히 도입부부터 나열되던 승관의 '보다 사회적인 사람'이라는 캐릭터가 아주 잘 보였던 것 같아요. 찬이 구태여 '와, 이 사람은 정말 사회적이고 선도 없고 경계도 없고 유쾌하다.'라고 정확한 서술을 해준 것은 아님에도, 얼굴을 못 본 시간이 있던 것 같은데도 능숙히 언 분위기를 풀어가는 도입부의 승관과, 자신이 주문해놨던 책을 읽고 있는 찬에게 '다 읽으신 거 보니 재밌으셨나 봐요?'라고 말을 건네는 승관의 모습을 통해 캐릭터를 아주 잘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보여주기로서의 캐릭터 설명이 꽤 자연스러웠다고 느꼈어요. 찬이라는 존재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존재는 서술의 관점을 담당하니만큼, 단지 승관을 어떤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고 생각하게 되는가만 살펴봐도 '아, 이런 사람이구나'라고 이해되는 부분이 있었어요. 전 텍스트 속의 등장인물들에 대한 외관과 외관의 묘사를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스타일이라서 더 그렇겠지만, 이 글의 현재 성격적인 묘사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운 몰입이 가능하리라고 느꼈습니다. 읽던 책인데 괜찮겠느냐며 묻는 단락에서, 별 큰 설명 없이 단지 말투만으로도 '오, 이 사람은 되게 능청맞고 유들유들한 사람이네.' 또 '그에 비해 이 사람의 대사는 되게 각져있구나. 엄청 냉랭한 것 같진 않지만, 확실히 긴장한 연하의 느낌이다...' 같은 감상이 느껴졌었습니다. 우짬님의 캐해석이 대사의 힘에서 유독 확 엿보이는 것 같아 대사 티키타카들을 즐겁게 읽었던 것 같네요.
결국 연체로 하여금 책을 쌓이게 만드는 것도, 단지 쌓여서 그 누구에게도 경험이 되지 못한 채 재고로만 남을 뻔한 것을 찬이에게 경험으로 남게끔 한 것도, 그 연체를 해결한 것도 전부 승관입니다. 글을 읽는 동안 제법 스토리의 많은 힘이 승관에게 가고 있다고 느꼈어요. 승관의 능수능란한 선 넘기 기술 또한 그 감상에 힘을 실었고요. 하여 중간의 승관의 방송을 목격한 찬의 장면이 좋았습니다. 승관이 '보이는 것과 다른' 속을 가진 사람이리라곤 예상했는데, 그걸 글 중에 가장 처음 목격한 건 독자도 방송 출연자들도 아닌, 아주 한순간 찰나의 인연이었던 찬이니까요. 승관은 (독자들이 느끼기에) 그의 마음을 꿰뚫은 것 같은 문장과 마주했으면서도 다른 목소리와 요란한 편집에 가려져 그 얼굴을 잘 드러내지 못합니다. 편집에 가려졌단 말이 정말 좋았어요. 그 표현 덕분에 찬이가 승관이란 사람을 '알아봤다'라는 느낌이 확 극대화되어서 와닿았었거든요. 찬이라는 존재에 대한 무게감, 어찌 보면 로맨스라고 할 수 있는 장르에서 로맨스의 주역인 두 사람의 파워가 균형을 찾아간다고 느꼈던 부분이었던 듯합니다.
앞부분에선 시적이긴 하지만 일상적인 무드가 더 강하다고 생각했는데, 승관이 오래도록 사라지는 그 시점부터는 문체의 시적인 느낌이 순간 커졌습니다. 아름다운 문장과 아름다운 서술과 아름다운 문체의 그 느낌. 전 그런 문장들도 좋아하기 때문에, 또 찬의 감정이 너무나도 잘 표현되어서... 감정이 차근차근 고조되는 느낌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다만 문체와 문장에 대한 힘은 취향의 영향을 꽤 받을 것 같다고도 생각했습니다.
찬이라는 존재가 승관과 찬이 처음 만났던 순간의 서점과 비슷해진다고 느꼈습니다. 서점에 쌓여가던 책: 즉 재고들, 그리고 책을 인용함으로 하여금 하나의 감정에 하나 혹은 여럿의 책을 투영시켜 차곡차곡 마음을 쌓아두는 찬이. 다른 것보다도 찬의 감정 묘사가 정말 좋았습니다. 여기서부터 우울해진다!!! 여기서부터 문학다워진다!!!라고 소리를 치는 게 아니라, 이입한 독자들이 찬을 따라 감정들을 차근차근 느껴갈 수 있도록 잘 조형된 글이라고 느꼈습니다.
책을 좋아하는 입장에서 책을 통해 서로를 교류하는 관계란... 정말 두근거리고 설렐 수밖에 없는 관계였던 것 같습니다. 찬이 쌓아두었던 재고(마음)가, 한참의 시간이 지나도 승관에게 가 책이 되고 경험이 되고 선명한 마음이 된다니... 책이라는 요소를 정말 낭만적이게 살리셨다고 생각했어요. 같은 문장을 읽고, 그 사람이 내 생각을 했을 문장에 나도 그 사람을 생각하고. 찬은 승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여태껏 기다려온 사람이니까요. 또 승관이 바라는 의미로 그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니까요. 책이라는 요소를 살린 지점에서도, 찬이라는 사람과 그의 차곡차곡 쌓여온 기다림을 표현한 지점에서도 너무 좋은 포인트였던 것 같습니다.
마지막 부분이 우짬님의 문체의 결정체를 달렸던 것 같습니다. 찬의 입장에선 승관이 계속 '마음: 미정' 상태이던 장기연체자였는데, 승관의 입장에선 아주 열렬한 표현이었다는 반전(?)도. 그 이후부터 이어진 '함께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와 같은, 책 밖의 우리들은 결코 알 수 없을 그들만의 찰나들에 대한 문장들도. 몰입하여 읽어 달리는 동안엔 정말 울림 있게 와닿았습니다. 🥹
총평...? 총감상...?이라고 해야 할까요? 여하간 장황하였던 비평(사실 비평이라기엔 많이 모자라 리뷰라고 해야 마땅할 것 같습니다만... ㅠㅠ)을 정리해 보자면... 찰나, 재난 판타지, 서점과 책. 그 세가지의 큰 요소를 무척 잘 버무리셔서 큰 꿰뚫음과 망가짐 없이 한 사랑의 역사를 적어내신 실력이 놀라웠습니다. 대사에서 나타나는 캐해석에 많이 감탄했고, 더불어 독자들의 눈앞에 시각적인 장면을 연출하여 띄워놓으시는 실력이 대단하다고 느꼈습니다. 글을 읽는 내내 계속 눈앞에 한 영화가 틀어져있어서 장면 하나하나가 시각적으로 보인 것 같은 느낌을 받았거든요.
좋은 글 적어주시고 공유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즐겁게 읽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