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짓숴님! 우선, 너무 늦은 감상 드리게 된 점 사과드립니다. 짓숴님께서는 괜찮다고 말씀해주셨지만, 제가 어떻게든 감상을 보내드리고 싶었어요…!

시작에 앞서 덧붙이자면, 짓숴님 시를 처음 읽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먹먹하고 가슴이 아렸는데 이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어떻게 해도 제 기분을 제대로 전달할 수 없을 것 같아서, 말문을 꺼내기가 더욱 더뎠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 감상을 쓰는 건 제게 일종의 도전처럼 느껴지기도 해요. 그치만 짓숴님의 탈리포트 야자나무를 읽고 느꼈던 이 아릿한 애상을 흐지부지 흘려보내는 것만큼은 하고 싶지 않았기에…미흡하게나마 제 기분을 표현하게 해주세요…!!

짓숴님께서는 글을 쓸 때의 복잡미묘한 심경을 생각하며 이 작품을 쓰셨다고 말씀하셨는데, 이런 의도는 말씀해주시지 않으셨다면 아예 모를 뻔했어요. 실례일지도 모르지만 저는 짓숴님의 의도와 상관없이, 무척 개인적인 감상에 젖었거든요.

아무것도 모르는 채 '탈리포트 야자나무'를 처음 읽었을 때도, 짓숴님의 덧붙임을 읽고 나서 몇 번이나 다시 읽은 이후에도, 제가 일관적으로 느끼는 감정은 너무 어리고 환하고 젊은 청춘을 바라보는 안타까움과 가여움, 사랑스러움이 한데섞인 애틋함이에요. 아마 제가 마냥 젊은 나이가 아닌데다, 그 사실에 초조해할 시기도 이미 지날 만큼 나이가 들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어요.

자신에게는 영영 오지 않을 것 같은, 찬란한 프라임 오브 라이프를 줄곧 기다리고만 있는…. 다른 나무들이 봄을 수십번씩 맞이할 동안, 일생에 걸쳐 자신의 황금기를 기다리다 죽는 나무의 심정은…정말로 어떤 말에 비할 수 있을까요. 애초에 그런 개화기를 생의 황금기라고 부를 수 있기는 한 걸까요? 그런 끝은 오히려 고역스럽기만 하겠죠…그런 면에서 절망을 갖고 싶다는 첫 연의 표현이 무척 와닿았어요.

자신으로서는 영영 느낄 일 없을 천진한 죽음을… 그것도 너무 곱고 눈부셔서 안타깝기까지 한 아가들의 죽음을 그저 몇십번이고 바라보기만 해야 한다는 것도, 분명 봄을 죽음의 계절이라 비관하기에 충분한 계기가 되었겠죠. 곁에서 들리는 호탕한 웃음소리에 밴 젊은이의 (탈리포트 야자나무보다 더욱 젊기에 몰지각할 수밖에 없는) 무지한 오해도요.

하지만 이 시가 마냥 쓸쓸하거나 비관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은, '단추가 되고 싶다'는 구절 덕분이에요. 씨앗이 아니라 단추라는 표현이 아리송하게 느껴졌지만 (제가 읽으면서 뭔가를 놓쳤는지도 모르겠어요…)

그 길고 고단한 생애 끝에 희망하는 것이 다른 이들 같은 찬란한 봄날도, 좀더 안정된 명맥도 아니라 그저 그 자그맣고 단단한 단추라는 것이… 정말로 좋은 여운을 줬어요.

새로 싹이 돋아나고 자라고 만개하는 씨앗에 비해, 단추는 새로운 생명을 이어가겠다는 의지가 느껴지지 않아요. 정말로 저 혼자 동그마니 떨어져버리는 하나의 결론입니다. 하지만 그 역시 어디에 떨어지느냐에 따라, 천과 천을 잇듯이 세상을 연결하는 하나의 이음쇠가 되겠죠. 제 지리멸렬한 생애의 결론이 그 정도면 충분하다는 것이… 그 단단한 관조가, 뭐라 말할 수 없이.. 좋아요.

남들과 같은 황금기가 제 생애에는 오지 않을 것만 같은 불안, 막연함, 절망, 비관… 그 모든 애상을 품어낸 끝에 조그맣고 동그란 단추 한 알로 남고 싶다는, 그 자그만 바람이 결코 가볍게 느껴지지 않아요. 오히려 육십 일생에 느낄 수 있는 감상을 모두 응축해놓은 것마냥 단단하고 힘있게 느껴져요.

마냥 젊지 않은 사람으로서(.. ) 이런 시선을 담아낸 시를 읽을 수 있어서 무척 기쁘고 감사했습니다. 감상은 늦게 드리게 되었지만, 그간 몇번이나 읽어보며 무척 좋다고 거듭 감탄했어요. 표현이 서투른 탓에 계속 좋다는 말만 늘어놓게 될 듯해 이만 말을 줄이겠습니다. 멋진 시를 읽게 해주셔서 감사드리고, 앞으로도 건필하시길 바랍니다.